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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학[大學]
작성자 문방주
작성일자 2018-10-18
조회수 155

중국에서 유교가 국교로 채택된 한대() 이래 오경이 기본 경전으로 전해지다가 송대에 주희()가 당시 번성하던 불교와 도교에 맞서는 새로운 유학()의 체계를 세우면서 ≪예기≫에서 ≪중용≫과 ≪대학≫의 두 편을 독립시켜 사서 중심의 체재를 확립하였다.

49편으로 구성된 ≪예기≫ 중 제42편이 ≪대학≫에 해당한다. 주희는 ≪대학≫에 장구()를 짓고 자세한 해설을 붙이는 한편, 착간( : 책장 또는 편장의 순서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았다.

그는 전체를 경() 1장, 전() 10장으로 나누어 ‘경’은 공자()의 사상을 제자 증자()가 기술한 것이고, ‘전’은 증자의 생각을 그의 문인이 기록한 것이라고 하였다.

≪대학≫의 저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전통적으로는 ≪중용≫과 ≪대학≫이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지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공자세가 ≫에는 송나라에서 급( : )이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한나라 때 학자인 가규()도 공급()이 송에서 ≪대학≫을 경()으로 삼고 ≪중용≫을 위()로 삼아 지었다고 하며, 정현()도 이 설을 지지하고, 송대의 정호()·정이()는 “공씨가 남긴 책”이라고만 언급하였다.

주희는 전을 “증자의 사상을 그의 문인이 기술한 것이다.”라 하였는데, 자사가 바로 증자의 문인이기 때문에 그의 주장도 ≪대학≫은 자사의 저작이라는 견해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청대()에 오면 실증적·고증적으로 검토, 비판하는 학풍이 일어나면서, 종래의 자사 저작설도 비판되어 진한() 사이에 또는 전국시대 어느 사상가의 저작이라는 설, 자사가 지은 것이 틀림없다는 설 등이 있으나, 유가의 학자가 지은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대체로 일치한다.

≪대학≫의 내용은 삼강령 팔조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강령은 모든 이론의 으뜸이 되는 큰 줄거리라는 뜻을 지니며, 명명덕()·신민[·]·지어지선()이 이에 해당되고, 팔조목은 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말한다.

≪대학≫은 ≪예기≫ 가운데 한 편의 형태로 우리 나라에 들어왔을 것이라 추측된다. 7세기경의 신라 임신서기석()에는 ≪예기≫를 ≪시경≫·≪서경≫과 함께 습득할 것을 맹세하는 화랑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372년(소수림왕 2)에 세운 태학()을 관장한 사람이 오경박사()였으니, 고구려에서도 일찍부터 ≪예기≫가 교수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기에도 국학 3과정과 독서삼품과의 과목으로 ≪예기≫는 중요시된 경전이었다.

고려 유교의 학풍은 경전중심이어서 예종 때의 국학칠재와 사학() 등에서도 경연의 주요과목으로 ≪예기≫가 자주 강론되었다. 조선 태조는 ≪대학≫의 체재를 제왕의 정치귀감으로 편찬한 송대 진덕수()의 ≪대학연의 ≫를 유창( : 초명은 )으로 하여금 진강()하게 하였다. 그 뒤 ≪대학연의≫를 어전에서 강의하는 전통이 마련되었다.

주희가 독립시킨 ≪대학≫은 1419년(세종 1) ≪성리대전≫·≪사서오경대전≫이 명나라로부터 수입될 때 함께 들어왔다.

주희의 ≪대학장구≫에 대한 최초의 비판은 이언적()에서 비롯된다. 그는 ≪대학장구보유 ≫에서 주희의 일경십전()을 일경구전()으로 산정()하면서 편차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주자학이 관학으로 정립되고 성현의 편언척구()가 신성시되던 조선 중기에는 주희의 체계를 긍정한 바탕에서 나름의 해석을 모색하는 데 그쳤다.

이와 같은 고식적인 풍토에 반발한 윤휴()는 ≪대학고본별록 ≫과 ≪대학전편대지안설 ≫에서 주희의 방법론적 준거였던 ‘격물’이 지적 탐구가 아니라, 종교적 경건으로 해석되어야 하며, 본래 ≪예기≫ 안에 있던 ≪대학고본≫이 아무런 착간도 없는 정본()임을 주장하였다.

박세당()은 ≪대학사변록 ≫에서 철저한 고증에 의해 ≪대학≫이 복원되어야 하며, 주희가 가한 해석이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이고 고답적이라 비판하면서, 구체적 실천의 관점을 강조하였다.

정약용()은 정조와의 문답을 정리한 ≪대학강의 ≫, 그리고 ≪고본대학≫에 입각해 ≪대학≫ 본래의 정신을 탐색한 ≪대학공의 ≫를 저술해 명명덕·신민만으로도 강령이 될 수 있으며 격물·치지는 팔조목에 들 수 없다 하여, 격물·치지에 입각한 성리학적 사유의 재검토를 촉구하기도 하였다.

삼국시대에 ≪예기≫는 이미 유포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 그 유입과 전파경로는 알 수 없다. 1045년(정종 11) 왕이 당나라의 공영달()이 찬한 ≪신간예기정의≫ 한 질을 어서각()에 두고 나머지는 문신에게 나누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주희의 ≪대학장구≫가 처음 반입된 것은 고려 공민왕 19년(1370) 명나라에서 ≪대통력≫·≪육경≫·≪통감≫과 함께였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있다.

1423년(세종 5) ≪대학≫을 포함한 사서오경 10부를 성균관·오부학당에 분급()하였고, 1435년 각 도의 수령에게 명하여 그것을 향교에 비치하라고 하였다. 개인이 자비로 갖추고자 할 때는 종이를 보내면 주자소에서 찍어주게 하였다.

15세기 말 함경도·평안도·제주도에까지 ≪대학≫이 보급되었다. 선조 때부터 진행된 언해사업은 1576년(선조 9)이이()가 왕명을 받아 13년 만에 완성, 간행하여 도산서원에 하사되었으며, 1605년에 재반포되어 널리 읽혀지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학 [大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