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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금원산 마애삼존불을 찾아가는 이유?
작성자 문방주
작성일자 2019-05-30
조회수 293
지난 일요일 홀로 산행 도중 산청 필봉산 정상에서 우연히 만난 대구의 청담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금원산의 지정된 곳에 가보고 싶어진다.
제대로 된 원(願)을 세우고 찾아 가야된다던 이야기를 까맣게 잊은 채 뻥튀기 과자만을 들고 어김없이 홀로 터벅터벅 그렇게 올라간다.
더운 탓에 웃 옷을 벗어 걸쳐들고 인적없는 산길을 올라간다.
이유는 하나다. 그의 이야기가 펙트이길 바라면서 확인하고 싶다.
미리 찾은 인터넷 자료와 달리 삼존불은 주불인 아미타부처님과 좌우협시보살 관세음보살님, 보현보살님으로 여겨진다. 다른 인터넷자료에는 보현보살님 대신에 지장보살님이라는데 그건 잘못되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지장보살님은 머리에 보관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암튼 잠시나마 혼자만의 시간에 감사하고 미력하나마 내 인생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훗날 다시 필봉산 정상에서 그 분을 다시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나눌지 사뭇 궁금하다.
귀한 인연이길 바라면 욕심이라할까?
아래 자료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의 일부이다. 2019-05-30. 또 하나의 사진은 한국에서 단일바위로는 제일 크다는 문바위.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상천리 산 6-2번지 금원산 자연 휴양림 커다란 천연 동굴의 바위를 얕게 파고 만든 고려 시대 마애 여래 삼존 입상이다. 거창 가섭암지 마애 여래 삼존 입상이 있는 가섭암의 창건과 폐사(廢寺)에 대한 기록은 정확하게 전하지 않는다. 현재 관련 자료는 가섭암 마애 여래 삼존 입상의 내력을 기록한 조상기(造像記)와 가섭사가 나오는 고지도, 화첩 등이 있다. 불상 조상기에 새겨진 연대가 확인되어 1111년(고려 예종 6)에 조성된 것을 알 수 있으며, 18세기 전반에 제작된 『여지도(輿地圖)』, 안음현 지도(安陰縣地圖)에 가섭사가 표기되어 있다. 또한 18세기 후반에 진재(眞宰) 김윤겸(金允謙)[1711~1775]이 영남 지역 명승지를 유람하고 그린 『영남 명승첩(嶺南名勝帖)』에 가섭암의 전경이 수록되어 있다. 그림에는 2×1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 1동과 담장과 문이 있는 소규모 암자로 표현되어 있다. 이 자료들을 통해 가섭암은 12세기 초반에서 18세기 후반기까지 있던 절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거창 가섭암지 마애 여래 삼존 입상은 2002년에 불상을 보수하면서 불상에 식생하는 지의류 등을 제거하고 불상 상부의 잡목을 제거했으며 빗물 차단 시설을 설치하였고 불상 크기를 실측하고 보고서를 발간하였다.
 
거창 가섭암지 마애 여래 삼존 입상은 자연 동굴 암반 한쪽 면을 연꽃 봉우리 모양으로 파고, 안에 삼존불을 부조(浮彫)로 조각하였다. 연꽃 봉우리 형태의 윤곽은 삼존불의 광배를 표현한 듯하며 빗물 피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깊게 골을 파서 윤곽을 따라 물이 흘러내리도록 하였다. 본존불 여래 입상은 '凸' 형태의 대좌 위에 서 있으며 머리는 소발(素髮)[별다른 장식이 없는 민머리 형태]이며 정수리에 육계[부처의 정수리에 머리뼈가 상투처럼 우뚝 솟아오른 모양. 지혜의 상징]가 크고 높게 솟아 있다. 얼굴은 둥글고 빰과 턱이 부풀어 있으며 이목구비는 작게 표현되었고 삼도의 표현은 생략되었다. 양 다리는 일자로 쭉 뻗어 평면적이고 발은 좌우로 벌리고 발꿈치를 맞대고 있다. 옷 주름은 가슴에서 무릎까지 'U'자형 주름이 간결하게 표현되어 있다. 높이는 115㎝[대좌와 두광 포함 215㎝]이다.
 
좌협시 보살은 본존불에 비하여 신체가 가늘며 얼굴은 본존불과 흡사하며 전체 높이 154㎝이다. 우협시 보살은 전체 높이 150㎝ 정도이며 좌협시 보살과 유사하게 표현되었다.
 
좌협시 보살상의 좌측에 가로 70㎝, 세로 88㎝, 깊이 2~3㎝로 암벽을 파내어 불상 조상기를 새겨 놓았지만 마모가 심해 식별하기가 어렵다. 1989년 동국 대학교 학술 조사단이 조사하여 해서체로 1행 26자 총21행에 540여 자가 음각되었음을 밝혔다. 이 중에 판독 가능한 글자는 120여 자이다. “천경원년십월(天慶元年十月)”이라는 불상 조성 연대가 확인되어 1111년(고려 예종 6)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왕(王)”, “욕보(欲報)”,“염망모이○은(念亡母以○恩)” 등의 구절이 확인되어 고려 국왕이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고 극락왕생을 발원하기 위해 불상을 만들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